LoginJionID/PWLinker
Community
 notice
공지사항
  프라트 작가 초대 개인전
ㆍ작성일: 2018/05/25 (금)  



 
강호생 Hosaeng Kang

선율
-생명의 소리_旋律-生命的 聲音 melody-the sound of life


인식에 대한 깊이와 넓이와 높이
, 즉 입체적 사고가 결여된 상태에서의 일들은 본질을 깨닫기에 역부족이다. 평평한 그림자만 가지고 원형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식을 가지고 붓을 드는 화가들은 대부분 이 본질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을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를 배회하며 희박한 답을 찾아내려고 끊임없는 자신과의 투쟁을 버릴 것이다. 만족하는가?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가치가 있는 것인가? 자작(自作)의 희소성에 오만한 것인가? 연실 터져 나오는 질문들은 작가의 슈퍼에고마저도 멍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살면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인식의 입체적 사고를 중시하는 작가는 그리 흔치 않다.

'선율-생명의 소리'라는 주제로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는 상기와 같은 질문들로 충만하다. 현상으로 나타난, 그리고 그것을 통한 인식이 본질이라면 이것은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이기에 고정화된 인식은 본질 성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물음에 그림을 왜 그려야 하는가? 라는 것은 자기 성찰로도 연결이 된다. 무엇을 그리느냐? 어떻게 그리느냐? 왜 그려야 하냐?... '기표''기의'를 포함한 것이 '기호'라고 설명한 퍼스의 삼부 모형을 보면 이것을 기호학으로 얘기한다. 기표없는 기의만 가지고 기호가 될 수 없듯이 기의 없고 기표만 가지고도 기호가 될 수 없다. 이는 '무엇what''방법how'을 포함하면 'why'라는 것과도 닮아 있다. '''본질'이라면 '무엇' 없는 '방법'은 왜가 성립이 안되며, 방법 없는 무엇 또한 왜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무엇과 방법 그리고 기표와 기의 결합은 의미작용으로써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 태도는 부유하는 배의 등대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여기서 더 특이한 생각을 내놓는다. [무엇과 방법의 합이 ''일 때에 '방법'의 산출은 왜에서 무엇을 제거하는 것이고, '무엇'의 산출은 왜에서 방법을 제거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서 무엇, 방법에서 방법, 왜에서 왜를 제거하면 모두 제로가 된다. 이와 같이 기호는 기표와 기의에 대한 합으로 산출되어 '기의'의 값은 기호에서 기표를, '기표'는 기호에서 기의를 제거한 값으로 도달한다. 여기에서 기호가 본질로 본다면, 본질은 기표와 기의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현상의 값을 통하여 본질이 인식된다는 것인데, 동시에 본질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발전하는 것이기에 고정된 인식으로서는 본질에 다가가기 불가능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발전되어 움직이고 있는 현상들에 충실하다. 경우의 수를 탐구하는 것, 그것은 작가의 작품제작에 대한 근간이 되어왔다.

이번 발표작들의 '선율-생명의 소리' 시리즈는 작품 제작의 '방법'을 변형시키고 있다. 물론 작가가 변함없이 기저로 두고 있는 것은 묵과 여백미라고 할 수 있다. 고요함으로 모든 것을 중화시키며 희생물로 대체된 먹과 그리고 숨 쉬는 생명의 공간으로 설정된 여백미의 산출 값은 더하는 것이 아닌 빼내어 비워둠으로써 완성에 접근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비워둠이란 애초부터 없던 것이 아닌, 있었던 또는 있어야 된다고 주입하는 현상들에 대한 절제이다. 있음(,)은 없음(,)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는 여백미의 진수를 맛보았기에 작가의 이러한 개념 태도는 자신의 굳건한 반석이 되는 셈이다.

가야금 보다는 거문고 소리가 좋다고 하는 작가, 트럼펫보다는 호른 소리가, 바이올린 보다는 첼로 소리가 좋다고 하는 작가다. 그 좋아하는 소리는 마침내 '묵의 장중한 맛과도 같다'라고 한다. 활처럼 팽팽해진 줄에 먹물을 바르고 백색의 화면 위에 먹줄을 튕긴다. 무거운 울림과 파동은 오묘한 현상들의 선율로 나타난다. 파동의 먹물은 금방이라도 들릴 듯한 생명의 소리로 다가온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수직과 수평의 교차된 먹줄들은 마치 몬드리안이나 프랭크스텔라의 차가운 추상을 연상시키지만 직관적 수묵화의 필법과 용묵에 착안된 이른바 뜨거운 추상의 앵포르멜 선풍을 몰아온 죠지마튜의 운필로부터 피에르술라쥬, 프란츠클라인, 샘프란시스, 모리스루이스, 헬렌프랑켄탈러, 파묵조 기법의 윌렘드쿠닝, 초서체의 마크토비, 굵은 묵필의 로버트마더웰 등에서 나타난 것들은 작가의 뜨거움과 일치한다. 외관의 색채는 유화 같은가하면 이면에 더 짙게 풍기는 것은 동양적 신비감이 뜨거운 마음을 갖게 한다. 이 두 개를 오묘히 합친 것은 헤겔의 정반합에 대한 원리와 다르지 않다. 모래위의 집이 아닌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은 바른 정신이 바른 결과물을 낳는 것과 같이 '마음의 전달이 소홀하면 기교는 눈에 띄게 드러나는 법' 이라고 작가는 또 다시 강조한다.

그러므로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세계관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사랑'이라는 것이며 작가의 함축된 이러한 언어 속에서도 본질의 여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은 그리지 않는 것이 그림이다!' 라고...

 

이재경 Jaikyung Lee

One-ness : 하나-됨의 틈새를 일별(一瞥)하다 -이재경의 작품들에 대한 신학박사(Ph.D.) 임봉경의 고백적 단상(斷想)

실재와 또 다른 실재 사이의 하나-됨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하나에서 둘로의 분리는 가능한 불가능성이다. 하나-됨과 분리는 상식과 수학을 초월하는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거기에는 있음과 떠남, 통합과 해체, 공존과 이산(離散), 내재와 초월, 그리움과 환멸이 뒤섞인 신비하고도 막연한 기대가 스며들어 있다. 하나-됨은 선(善)이고 분리는 악(惡)이란 이원론적인 접근법으론 불가해한, 현상학적 접근으론 침입할 수 없는 양가성(兩價性)의 영역이 이 둘 사이에 존재한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합일, 합일된 분리를 꿈꾸듯이, 이재경의 일련의 노작(勞作)에는 비정형의 단순한 형상이 실낱같은 틈새를 사이에 두고 분리된 듯 합일된 듯 이어져있다. 그 틈새는 작고 가늘지만 강렬하고 신비한 느낌마저 주어 보는 이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등을 돌린 듯 마주하고 있는 두 색면은 자아(自我)와 비아(非我), 주관과 객관, 현상과 본질, 관념과 실존 사이의 영원히 불가능한 합일을 꿈꾸듯 각박해 보인다. 
그러나 이재경의 궁극적 관심은 두 실재 사이의 영원한 공백, 실낱같은 틈새, 아니 더 나아가 그 틈새 사이에서 벌어질 것 같은 일에 대한 신비적 환상에 있다. 두 색면의 질료와 색상에 쏟은 그의 노력도 사실상 틈새에 집중돼 있다. 독립된 두 실재가 그 틈새 속에서 합일하는 신비적 현상에 골몰해 있는 것이다. 하나와 둘은 인간적이고 실존적이지만 셋은 영적이고 신성한 것이다. 틈새는 두 실재 사이에 있는 제3의 영역, 비무장지대, 신성불가침의 공간. 신성만이 채울 수 있는 거룩한 공백이다. 이 공백은 두 실재 사이에 분리와 합일을 동시에 일으키는, 비가시적이고 영원한, 시공을 초월한 신의 영역이다. 그것은 이재경이 그의 그림세계에서 일관되게 지향하는 포인트이다. 그녀는 이 작품들에서 두 실재의 강렬한 색면들과 신비하게 보이는 가느다란 틈새 사이의 역학적 관계를 통해 하나-됨을 짙게 그려내고 있다.


문수만
Sooman Moon

시간의 문을 통과하는 자연과 문명의 행-이선영(미술평론가)

보이지 않는 중심을 둘러싼 둥근 원, 그 원 속의 또 다른 원들이 있는 문수만의 작품은 정적인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 끝과 끝이 이어진 원 자체가 정중동(靜中動)이다. 전시된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적용된 원형 구도는 차이 짓기를 위한 동일한 바탕을 이룬다. 우연 또한 필연이라는 맥락에서 힘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질서가 있는 가운데 무질서가 있다. 그가 잘 그리는 나비까지 포함한다면, 무거움 속의 가벼움 또한 추가될 수 있으리라. 문수만의 작품은 이렇게 상반된 가치들이 밀고 당기는 역동적인 장을 이룬다. 둥근 작품들에는 중심이 있는 자리가 있을 뿐, 어느 한 점으로의 환원은 없다. 그리고 다양한 중심들 사이에 분포하는 형상들이 작품들 간의 차이를 만든다. 반복과 차이 속에서 무한 회귀하는 작품들은 전시 작품의 한 제목처럼 [시간의 문]을 통과한다. 복잡한 작업공정이 깔려 있는 그의 작품에는 시간성이 깔려 있었으나,

2018년의 첫 전시 작품에서 시간성은 더욱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청동거울 유물의 이미지가 있는 [시간의 문] 시리즈는 거울의 뒷면, 즉 공간이면서도 시간성을 암시한다. 거울은 인간을 상상의 요구에 맞춰 고착시키지만, 거울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염두에 두는 것은 시간의 축 속에 자아를 배치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유물은 현장에서 발굴되고 박물관에 보존된 이후에는 부식의 과정이 완화된다. 시간성에는 변수가 많이 개입된다. 작가 역시 어느 순간에 이 낡아지는 과정을 멈추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에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의 말로는 망치기 직전까지간 작품도 꽤 있었다. 이전 작품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쉬울 정도였다. 그것은 완결된 과정을 열어놓는 것에 해당한다. 필연적인 맥락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긁히고 부식된 형태, 파묻혀지거나 우연적으로 드러난 형태들을 비롯하여, 시간성을 암시하기 위해 더 많은 공정이 추가되었다. 빈티지 청바지가 그냥 청바지보다 더 많은 수공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문수만의 작품은 오래된 문화재처럼 정교하고도 분위기 있는 사물로서의 면모를 획득한다. 작가가 매혹되는 것도 자의와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는 일단의 현대미술은 아니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적 속성을 띄는 그의 작품은 현대성의 한가운데에 있다. 미술계에 시뮬라크르에 대한 주제의 작품이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설득력 있기 위해 갖춰야할 정교함을 수반한 작품이 흔치는 않다. 작품이 문화재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완벽한 것을 더욱 완벽하게 하는 것은 시간 아닐까. 순간 속에 완결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작품들은 이제 지속의 단계에 들어섰다. 원 가운데 또 다른 원들, 그 사이로 촘촘한 바퀴살들이 뻗은 [시간의 문]은 마치 태양처럼 보인다. 그것은 인간 이전에도 있었고 인간 이후에도 있을 영겁회귀의 궤도를 돈다. 이러한 우주적 차원의 사건은 지상에서도 반복된다. 원들 사이의 공간 속에 꽃이 펼쳐져 있는 작품들은 지상에서 영겁회귀의 직관적 모델로 식물을 떠오르게 한다. 식물학자들은 한겨울의 나목이 죽은 듯 하다가도 다음해 다시 꽃을 피우며, 인간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고 말한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꽃들은 유기적인 형태를 가지지만, 짝을 맞춰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의 내재율을 반복한다. 그에게 자연은 단지 외관이 아니라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에는 리듬이 있다. 살아있는 심장을 가진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직관적으로 리듬에 대한 선호가 있다. 작가는 기계적 패턴의 반복이 아니라 생명의 율동을 흉내 내는 것이다. 작품들 간의 관계도 리드미컬하다. 전시장 벽에 걸린 바퀴처럼 둥글둥글한 형태들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움직이는 듯한 환영이 있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동일한 밀도와 강도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지름을 한 작품들은 전시장 벽에서 가상의 원근감을 형성한다. 가령 작은 것은 멀리 있는 것, 큰 것은 가까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것들은 좌우로도. 그리고 전경과 후경 사이로도 움직이는 듯하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돌 뿐 아니라, 좌우로도 전후로도 움직인다. 행성이 자전을 하면서 항성을 공전하듯이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동시적이다. 여기에서 공간은 시간화 된다.

그의 작품에는 수많은 층이 있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발굴된 유물같이 흐들흐들한 시간의 겹을 각인한다. 밑에서 올라오는 것도 있으니 시간의 지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것들은 단지 시공간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오래된 껍질을 사라지면서 새로운 속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품 속 위아래 층들의 관계는 본질적으로는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회화인 작품에 잠재적 운동감을 부여한다. 어떤 것은 떠오르고 어떤 것은 가라앉는다. 둥근 형태는 질서감이 있지만, 겹과 층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들은 질서감을 와해시키는 요소이다. 반듯한 형태들은 먼지로 화하고 있다.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증가하고 있다. 두들겨서 만든 작품이라는 의미를 담은 [Klopfen]은 중간층에 대칭적으로 배열한 8개의 원을 포함하여 원 속의 원을 반복하는데, 가장 큰 원인 작품의 외곽은 원들의 세계에 내재한 안정감을 와해시킬 수도 있는 힘이 작동한다. 작품 [Simulacre(041708)]은 그러한 힘이 전체를 장악한다.(중략)

::(재)운보문화재단:: 363-933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2길 92-41(형동리)   TEL:043-213-0570   FAX:043-213-1614  E-mail : woonbo@woonbo.kr